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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타강사 김미경 인터뷰내용

닮은하루 2009. 2. 14. 12:36

요즘 유쾌한 입담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스타강사 김미경씨! 그녀는 음대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CM송을 제작해서 월 20만원이 조금 넘는 박봉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그녀는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단칸방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는데요. 김미경 씨 특유의 뚝심과 열정 덕분에 더 이상 돈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학원은 금방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머물 수 없었는데요. 안정적인 수입보다는 불안하지만 도전하고픈 꿈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혼여성들에게 삶의 열정을 되찾아주는 라이프코치, 최고의 인기강사가 됐습니다.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컨텐츠를 키워나가라’는 김미경씨(더블유인사이츠 대표)를 10월 3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강의만 하면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사투리 튀어나와

▶ 요즘 잠 잘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바쁘시다면서요?

바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아요. 제가 저 자신을 자꾸만 타이트하고 스피드하게 살려고 몰아넣는 작업을 꽤 오랫동안 했어요. 그래서 하루에 한 4시간 이상은 절대 자지 말자, 수험생처럼 살아야만 내가 회사도 이끌어 나가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작정한 것이 6년 전이예요. 그래서 4시간 정도 자고 하루의 시간관리를 열심히 해서 그 시간에 가장 효율있는 일을 만들려고 애를 많이 쓰죠.

▶ 인기강사는 부업이고 본업은 컨설팅 해주시는 거로군요.

인기 강사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강의는 16년을 했어요. 벌써 꽤 오래 됐거든요. 29살 때부터 지금까지 16년 정도 강의를 한거고요. 그러니까 강의가 저의 사업의 근간이 된 거죠. 그러다가 한 8년 전부터 회사 규모를 갖춰가면서 직원들을 고용하고 제가 강의로서 풀어내는 컨텐츠를 이제는 회사에게 가공해서 드릴 수 있는 어떤 지적 재산으로 파트 하나하나를 만들어 나갔어요. 그래서 이제는 회사가 도약을 많이 해야하는 상황에 와있죠.

▶ 그럼 직원은 몇 분이나 되세요?

회사 직원은 20여명 정도 되는데요. 저희 회사의 특이한 점은 몽땅 여자예요. 남직원이 하나도 없어요. 특별히 여자를 뽑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요. 남자가 들어와서 현재 우리 여성 인력들이 해나가고 있는 여러 컨텐츠 생산 작업을 더 잘할 수 있는 남자를 못 만났어요. 면접을 해보면요. 그래서 능력 위주로 뽑다 보니까 여자 직원들로 채워져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 회사 조직문화는 굉장히 독특해요.

▶ 방송에서 충청도 사투리 쓰시는 것은 가끔 양념으로 하시는 건가요? 지금은 전혀 사투리 쓰시는 느낌이 없거든요.

이렇게 1:1로 말씀을 나눌 때는 제가 사투리를 별로 안 쓰는데, 강의를 한다는 것은 저의 경험과 청중속으로 몰입하게 되잖아요. 흔히 우리들이 작두 탄다고 하고 신이 난다고도 하잖아요. 신이 나면 저도 모르게 얘기하다가 막 나와요. “어우, 그런겨?” 하고 막 나와요.

◇ 아버지 반대에도 음대 도전, 연대 작곡과 수석 입학

▶ 그런데 대학은 연세대 음대를 가셨어요?

제가 충청북도 증평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음악을 잘했어요. 저는 증평이라는 동네에 대해서 살면서 참 감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증평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거예요. 왜냐하면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면 좋은 점이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정말 쉬워요.

아이들이 몇 명 안되기 때문에 조금만 잘하면 “얘가 증평에서 노래는 제일 잘해, 얘가 증평에서 뭐는 제일 잘해” 그렇게 되잖아요. 제가 증평에서 제일 잘 한 것이 노래였어요. 그래서 가을에 증평읍에서 교회들 모여서 문학의 밤 이런 걸 하잖아요. 그러면 제가 상 다 타왔거든요. 근데 어릴 때는 증평이 저한테는 우리나라잖아요. 증평에서 제일 잘하면 국내에서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착각을 하면서 크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아주 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서울에서 경쟁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 지방 각 도시에서 우수한 인재로 자라는 것도 정말 괜찮은 메리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증평에서 배짱이 세져서 한 번 청주로 나가보자, 내가 고등학교를 청주로 가보자, 시에 사는 애들은 얼마나 잘하나 했더니 아이들이 청주시 애들은 대단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청주를 나가봤더니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제가 제일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한 번 가봐야겠다 라고 생각했죠.

그 때 음대는 예고 다니는 서울아이들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 같은 시골 출신들은 잘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서울에 올려 오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어요.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셨는데요. 그래서 아버지가 음대를 가지말고 사범대학 나와서 음악선생님 하라고 하셨어요.

옛날에 시골 분들은 다 그러셨잖아요. 눈에 보이는 안정적인 길이니까 그러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버지, 나는 서울로 꼭 대학을 가고 싶은데...” 했더니 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셔서 제가 아버지와 크게 한 번 맞붙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제가 방안에 망치를 들고 들어가서 문에 대못을 한 5개를 박았어요. 문을 못 열게하고 저는 방안에서 2주를 굶은 거예요.

나를 서울에 안 보내주면 죽는다고 한거죠.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가 손 번쩍 들고 욕을 하시면서 “저 고집센 것 같으니. 네 멋대로 해라.”라고 하셔서 서울로 대학가는 허락을 받아냈고요. 정말 엄청나게 밤을 새워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노래했던 것을 살리고, 피아노 쳤던 것,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논리적인 사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뭘 할까 하다가 작곡과를 택했고, 제가 연대 작곡과를 들어갈 때는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증평에서 난리 났어요. 원래 증평에서 연세대학교만 가도 플래카드 걸거든요. 그 때 제가 수석했다고 그렇게 반대하시던 우리 아버지가 흥분해서 난리 나셨잖아요. 아버지가 자비로 직접 플래카드 5개 걸으셨잖아요. “장하다, 둘째 딸 김미경”이라고 해서요. 그것 보신 읍장님이 5개 걸어주시고요. 그래서 제가 플래카드 10개 걸고 들어갔어요.

▶ 그러고보니 조신한 것과는 달리 굉장히 말괄량이시고 씩씩하셨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정말 말괄량이였고, 정말 씩씩했고, 저희 아버지랑도 굉장히 대화가 잘 통한 사람이었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지금도 그래요. 저희가 딸 넷, 아들 하나인데, 그 중에 제가 둘째 딸이거든요. 아버지가 “아버지랑 대화 통하고 배짱 통하는 딸이 있어서 너무 좋다, 그게 너다.” 라는 말씀 많이 하셨죠.

▶ 그렇게 해서 서울에 오시니까 증평에서 살던 때와는 뭔가 다르던가요?

정서적으로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정서적 차이는 책임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서울 서교동에서 태어난 사람이 ‘내가 서교동을 한 번 살려보리라, 세상에 알리리라’ 하는 생각은 안 하는데, 저는 증평에서 살아서 그런지 어떻게든 증평을 알려야겠다는 책임감도 있고, 내가 증평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 증평군수님이 증평을 빛낸 사람이라고 해서 저 상패 받았어요. 근데 받으면서 가슴이 찡하고 묘하더라고요. 외국에 나가면 한국을 알린 자부심에 눈물이 찡하고 가슴 터지듯이 ‘내가 증평을 더 알리고말껴’ 하는 느낌이 강하게 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진짜 ‘내가 어떻게든지 연희동을 알리고말껴’ 하는 생각을 서울 사람은 못 하는데 저는 그것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스타 강사는 어떻게 해서 되신 건가요? 학교 다닐 때부터 친구들한테 말을 잘한다는 평을 많이 들으신 건가요?

강의를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머리의 지식을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삶과 함께 섞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잇게 말을 하고 하는 것은 저는 일단 어느 정도의 타고난 사명감과 재능은 분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무리 머릿속에 많아도 정리가 안되면 뒤죽박죽 나가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음악을 한 것도 도움이 많이 되요. 작곡이라고 하는 것도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논리정연하게 음표로 풀어내는 거거든요. 그런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음악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말로 해서 강의로 풀 것이냐 인데요. 대학 다니는 내내는 저는 음악은 사실 별로 못했어요.

음악을 안한 이유가 그 당시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데모하고 뛰어다니고 사회과학 도서에 심취하던 때예요. 그런데 제가 데모를 잘 하는 열심히 하는 남자를 만났죠. 그래서 저는 민주화는 별로 안 했고요. 민주화하는 남자를 사귄 거죠. 남들이 제가 민주화를 했다고 하는데 착각이예요. 민주화 하는 남자를 사귄 것이 정확한 표현인데, 물론 그 남자와 결혼하지는 않았고 그냥 사귀기만 했어요.(웃음)

그래서 뭔가 음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다른 생각들을 많이 하고, 다른 생각의 단서가 될만한 책도 많이 읽었고, 그런 것이 제가 강사가 되는데 기반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만약에 음악만 했으면 아마 피아노 열심히 치고 그냥 곱게 있다가 누군가에게 곱게 시집간 일반적인 제 친구들이 갔던 그 길을 저도 갔을 것 같은데, 자꾸만 많은 생각을 하게된거죠.

그 때부터 나는 ‘뭘 하면 잘할 수 있을까’ 하다가 조직 생활을 경험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음대를 나온 학생들이 조직 생활을 안하고 대부분 선생님이 되거나 유학을 가거나 시집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조직생활을 하자고 해서 광고회사에 들어갔어요. 열심히 이력서 내고 머리 깨지게 인터뷰 해서 들어갔죠.

그래서 광고회사에서 CM송 작곡을 했어요. 광고음악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2년 정도 일을 했고요. 그러던 중에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죠. 월급이 너무 조금 주더라고요. 그런데 저만 특별히 조금이 아니고 그 당시에 그 쪽 분야가 조금 적었어요. 그 때 큰 대기업의 급여가 40만원정도 였으니까 그렇게 작지는 않았는데, 그 쪽 분야가 워낙 프리랜서 개념의 일이 많기 때문에 제가 쓴 CM송이 채택이 되서 방송에 나가게 되면 인센티브를 받았어요.

▶ 그래서 방송에 나간 것이 있었나요?

뭐가 있었냐면요. ‘오예스’라는 제품이 있었는데, 제가 몇 곡 작곡해서 2곡이 채택되었어요. 인센티브가 얼마 안되서 간신히 굶어 죽는 것을 면했죠. 그렇게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제가 피아노 학원을 하게 되었어요.

◇ 반지하에서 시작한 피아노 학원


▶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된거죠. 그런데 돈이 없어서요. 저는 원래 그렇게 가난하게 크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셨기 때문에요. 증평에서 “리리 양장점집 딸” 하면 저희 딸 넷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할 때 아주 아주 가난한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그 이유는 뭐냐면 제가 원래 가난한 남자를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 남자는 어떤 남자냐면요. 어릴 때부터 근거 있고 히스토리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5백만원 있다고 하면 그 5백만원 어디서 났냐고 하면 “내가 5백만원을 어떻게 받았는지 알아?” 혹은 “이 5백만원을 위해서 얼마나 죽어라고 돈을 벌며 힘들었는지 알아?” 이 이야기를 2박3일을 하면 저는 그 2박3일이 좋은거지, 5백만원이 좋은 것이 아니예요. 그런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저력있고 근거있고 에너지 강한 남자를 나는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정말 가난한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엄청 반대하고 난리났었어요. 아주 작은 11평 반지하에서 어렵게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남자만 있으면 되지’ 하는 생각 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또 아니더라고요. 돈도 많이 써야 하고 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피아노 한 대를 가지고 집에서 시작했죠.

반지하에서 시작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제가 반지하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 아니예요. 그래서 ‘김미경 피아노 교실’이라고 종이에 써서 전봇대에도 붙이고 아파트 입구에도 붙이는데요. 저는 태어나서 정말 경비아저씨가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그날이 처음이예요. “아가씨, 거기다 왜 붙여?” 그러면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나고요. 한 3일째 되니까 조금씩 익숙해지기는 하는데 저도 뻔뻔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경비아저씨들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뭘 원하실까 봤더니 ‘담배’를 원하신 거예요. 제가 정말 서민들끼리 담배 한 갑이면 된다는 경제학의 효과를 그 때 알았잖아요. 담배 한 갑을 사서 “아저씨, 고생하시네요. 담배 한 대 피우세요.” 하면서 한 갑을 드렸더니 경비아저씨가 갑자기 얼굴이 확 바뀌면서 다 놓구 가라고 자기가 다 붙여주겠다는 거예요. 담배 한 갑이 이렇게 사람의 사이를 좁히는 거구나.

나중에는 친해졌거든요. 그걸 알고 나서 사람이 정말 그냥 배우는 것 없고 다 돈내고 배운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직접 경비아저씨와의 그런 경험을 안 해봤다면 저는 그분들이 그렇게 순수하게 담배 한 갑으로 사람을 전폭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모르고 정말 섭섭하게만 생각했을 것 아니예요.

그래서 점점 아이들이 오고 조금씩 번창해 나가면서 한 1년 뒤에 음악학원을 차리게 되었죠. 그래서 피아노 학원을 차리면서도 굉장히 잘됐어요. 한 2년만에 원생이 180명까지 늘어서요. 잘 되었어요.

▶ 그렇게 잘 된 이유는 뭘까요?

그 때 저는 정말 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진실마케팅’이 최고라는 것을 느꼈어요. 사람들이 입소문타면 금방 팔린다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특히 여성의 입소문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교육사업은 엄마의 입소문이 100%예요. 엄마들이 “거기 학원 별로야.” 라고 하면 금방 망해요. 시간 얼마 안 걸려요. “그 학원 진짜 괜찮아. 원장 정말 여자 괜찮아.” 하면 그 학원으로 확 몰리거든요.

그런데 그걸 다른 것으로 할 것이 아니더라고요. 아이들 한 달 끝나고 나면 도장 찍어서 레슨비 보내라고 봉투 보내잖아요. 근데 엄마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안 들어있고 빈 봉투로 오잖아요. 근데 저는 보내면서 ‘내가 남의 집 귀한 금쪽 같은 아이들을 한 달을 가르쳐서 보냈으면 뭔가 넣어서 보내야지 이것을 그냥 보내서 돈을 받을 수는 없어’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당신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아이들을 가르치고 회비 봉투를 보낼 때 항상 A4용지로 한 장을 써서 보냈어요.

그리고 담임 선생님은 주로 학습에 대한 것을 썼어요. 체르니는 뭐 쳤고, 아이가 학원에 와서 어떻게 했고 하는 것을 쓰고, 그것을 뒷받침 할 만한 아이가 학원에 와서 가장 예뻤던 장면을 사진을 찍어서 그 당시는 인터넷이 없으니까 인화한 2장의 사진을 봉투에 넣어서 보냈어요.

그랬더니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는데요. 엄마들이 그 사진을 주로 어디다 두냐 하면 냉장고에 붙여요. 그리고 엄마들이 수다를 떨 때 주로 냉장고 옆에서 수다를 떨잖아요. 그래서 엄마들이 “저게 뭐야?” 하면, “김미경 원장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사진을 이렇게 2장 매달 찍어보내. 그렇게 젊은 여자가 순수하게 아이들을 이뻐하는 사람이 어딨니?” 하면서 엄마들 사이에 제가 아이들을 무지 이뻐한다고 얘기가 나온거예요.

근데 저는 그 말을 듣고 무지 웃겼던 것이 저는 애들을 별로 안 좋아해요. 왜 못된 이모 있죠. 이모 중에서도 조카 데려가면 애 다 봐주는 이모가 있는가 하면, 저는 공부해야 하거든 하면서 조금 쌀쌀 맞은 이모에 속했는데요. 정말로 이것을 사업으로 하니까 나한테 피아노를 배운다고 아이가 봉투를 들고 오면 이 세상에 안 예쁜 애가 한 명도 없는 거예요. 막 껴안고 물고 빨고 무릎에 앉히고 뒹굴고 놀고요. 정말 너무너무 상냥하게 이뻐했죠.

그런데 사람이 참 훈련인 것 같아요. 안 예뻤는데 이뻐하려고 애쓰고 이뻐하다 보니까 이뻐하는 방법을 제가 제일 잘 알게 되더라고요. 저는 그것이 일의 프로 같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벌었어요. 저는 ‘학원 하는 것이 뭐가 어려워? 이렇게 쉬운 걸..’ 하는 생각을 다 했어요.

▶ 금방 벌었다고 하셨는데, 얼마를 버셨어요?

월급쟁이 할 때는 25만원씩 벌었잖아요. 180명이라고 했는데 1명당 최소 4-5만원으로 하면 매출이 천여만원 정도 되겠죠. 그런데 선생님 월급 나가고, 월세 나가고 하는 거죠. 그래도 그 당시 4-5백만원 정도 벌면 굉장히 많이 번거죠.

◇ 잘되던 피아노 학원을 접고 ‘기업교육 강사’의 길로

▶ ‘라이프 코치’라는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 때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음악학원을 계속 하고 있는데, 음악학원 원장들 모임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송파구청에서 다같이 모여서 학원경영 잘 하라고 훈시하는 자리예요. 거기에 어떤 강사님이 오셔서 학원경영에 있어서 고객만족이 어떻고, 아이들과의 관계, 커뮤니케이션, 원장들의 직업관에 대한 강의를 하시는데요.

수백명이 모여서 그 강의를 들었고 저는 뒤에서 자려고 갔어요. 너무 피곤해서 자야겠다고 앉아있는데, 어떤 분이 나와서 강의를 하는데요. 정말 저는 머리를 철퇴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저는 모태신앙이라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항상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시다보면 내 마음이 문간에 있었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마음이 단상 앞으로 가있는 느낌, 말씀을 듣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 목사님도 아닌데, 사람 마음을 움직여? 저게 무슨 직업이래?’ 했더니, 그 당시 그 직업을 ‘산업강사’ 라고 하더라고요. 기업체에서 강의하시는 분들이요. 그래서 그 때는 인터넷이 없으니까 온 서점을 다 찾아 다니면서 ‘산업강사’ 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을 다 샀어요. 제가 그 직업이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면 저 사람보다 무조건 백배는 잘 할 수 있어. 난 무조건 할래’ 하는 생각이 마음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정이 뭔가에 맞은 것처럼 막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산업강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남편에게 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죠.

우리 남편이 무지 반대했죠. 뭐라고 하냐면 “너, 박동규 교수님 알아? 김동길 교수님 알아? 그런 분이나 하는 거거든. 평생 피아노나 뚱땅거리던 여자가 어떻게 강사를 하냐? 말도 안되는 소리하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보! 말도 안되는 소리는 당신이 하네. 한석봉 엄마가 첫 날부터 눈감고 떡 썰었냐? 그 여자도 첫날은 다 손 베었지. 5년만 시간을 달라. 내가 하겠다.”고 분명히 얘기를 했더니 남편이 원하면 열심히 해보라면서 지원하겠다고 했고, 그래서 학원을 바로 한 달만에 팔았죠.

그리고 나서 필요한 공부만 하러 다녔어요. 거의 2년 동안은 10원도 못 벌고 계속 공부만 하러 다녔어요. 책 많이 읽고, 대학원 바로 밑의 과정인 무슨무슨 과정, 6개월 경영과정 등을 들으면서 기업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고 하면서 1-2년을 하나하나 필드에서 경험을 쌓아나가기 시작한 거죠.

▶ 근데 왠만한 분들 같으면 한달에 4-5백 정도가 알토란처럼 들어오면 아까워서 피아노 학원의 끈을 못 놓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독하시기도 하네요.

독한 것도 있고 자신감도 있었고요. 저는 그 때 학원하면서 돈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는데요. 뭐가 만족스럽지 않았냐면 김미경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나이 40-50대가 되었을 때 내가 어떤 가치로 세상과 거래할 것인가로 고민했을 때 피아노 학원 원장은 아니겠더라고요. 그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러면서 나를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었고요.

그런데 이런 것이 있어요. 꿈이 있고, 목표가 있어서 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면 현재 벌고 있는 돈,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더 큰 위치가 보이니까 그냥 달려가는 거죠.

▶ 대부분 현실에 안주하게 되지 않나요? 주변 분들과 비교해 보면 어때요?

대부분 그렇죠. 친구들 중에서도 정말 꿈을 향해서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다른 꿈을 계획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요. 저는 꿈이 실현되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라고 봐요. 꿈은 아주 작게는 5년 후의 목표일 수도 있고, 다음 달 목표일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을 한번쯤 경험을 해봐서 ‘내가 조금 노력했더니 여기까지 왔네.’하는 치고 올라가고 획득하는 경험들은요, 더 큰 꿈을 꾸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꿈을 이야기 할 때 허황된 꿈이라고 이야기 하지 말고, 작은 꿈을 해보고 획득하고 자신감이 가져지면 ‘어, 내가 이런 것도 하네. 나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하는 경험지수가 사람을 계속 성장시키는 것 같아요.

◇ 저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이 되길 원해

▶ 꿈꾸는 것마다 다 성공하고 실패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일을 하다보면 버려야 할 때 굉장히 아쉬울 때가 있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버린 것 중에 가장 아까웠는데 정말 잘 버렸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너무 마음 아팠던 것 중에 하나가 한 회사에서 저를 굉장히 무시하는 일 하나를 처리 하셨어요.

그 때가 막 IMF 끝나고 나서 98, 99년도로 접어들었을 때인데요. 그 때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미래여성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인데 “교수님들은 A급 강사인데, 김미경 원장은 B급 강사다.” 자기들끼리 앉아서 탁상에서 A, B, C, D를 나눴더라고요. 근데 저는 그 회사를 위해서 지난 4년간 엄청난 컨텐츠를 개발해서 정말 죽기살기로 노력했고, 그 회사가 국내에 손꼽히는 회사예요.

근데 그 회사 강의가 제 강의의 40%였어요. 제가 100건 강의를 하면 40건은 그 회사 강의였어요. 근데 저를 갑자기 B급이라고 하면서 강사료를 딱 내려 버리는 거예요. 근데 돈보다도 훨씬 속상했던 것은 나는 A급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정말 사명감을 갖고 그 회사 직원들을 위해서 자료를 개발하고, 죽어라고 강의하고, 아무리 아파도 가서 강의했는데 어느 순간 B급이라고 통보를 하는 순간 ‘이건 대기업의 횡포다. 내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제가 가만두지 않는 방법은 뭐가 있어요. 강의를 안 나가는거죠. 제가 강의를 안 나간다고 그 회사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는 말렸어요. 그냥 참고 가라고요. 왜냐하면 “대기업을 혼자 싸워서 못이긴다, 네 강의의 40%인데 어떻게 살려고 하니?” 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이 강의를 버렸거든요. 그랬더니 그 쪽에서 굉장히 놀랬어요. 그런데 나로서는 나의 일에 대해 정당한 댓가를 받고 싶지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통보해 오신 분이 김미경 원장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부당함에 저항을 못하는 거고 나는 해야겠다, 내가 대표로 한다고 생각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40%의 강의를 포기하니까 저한테 남은 것이 있더라고요.

그 때 저는 정말 소중한 것을 얻었어요. 한 열흘 동안은 굉장히 속상했어요. 돈이 갑자기 줄어들고, 후회도 되고 했는데요. 40%의 강의를 안하니까 시간이 남더라고요. 그 회사를 안 가니까 시간이 남아서 제가 못 봤던 책을 보고 못 봤던 신문을 읽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신문에 보니까 ‘1999년부터 전국의 5인 이하 사업장,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이것은 교육계의 대박이다, 이런 것이 어딨냐 싶어서 제가 성희롱 예방교육에 대한 법률 통과하자마자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지 말고 당차게 살아라’ 라는 책을 쓰면서 최초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어요. 그것을 전국에 쫙 뿌렸거든요. 그것 때문에 우리 회사가 엄청 컸어요. 그래서 저는 저를 잘라준 회사에 감사한다니까요.

▶ 하도 하시는 일이 많아서 어떻게 소개해 드리는 것이 맞는 건가요?

제가 원래 강의로 시작을 했지만 강의속에 있는 컨텐츠를 가지고 사업을 만들어 나간 것이거든요. 저희 ‘더블유 인사이츠(w-insights)’의 ‘W’가 ‘우먼(Women)’이예요. 그래서 해석하면 여성에 대한 통찰력이죠.

그래서 저희 회사는 크게 보면 두 파트로 나뉘어져요. 여성인력 리더쉽 관련 분야를 기업에 컨텐츠를 개발해서 가서 강의하는 것이 있고요. 또 하나는 여성 고객 심리 마케팅을 국내에 가장 최초로 들여온 회사가 바로 우리 회사예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썼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국내에 쭉 도입을 해나가고 있죠. 컨설팅이라는 것도 있고요.

▶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열정적으로 치열하기도 했고, 발상이 달랐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항상 생각했던 것은 사람들이 저에 대해 가장 장점으로 얘기를 한다면요. 오늘도 우리 직원들이 저한테 그런 노래를 불러주더라고요. 태진아씨 노랜데요. ‘오너는 아무나 하나’하면서 부르더라고요. 제가 무슨 노래냐고 했더니요. 저희 회사는 주택이예요. 1층에는 커피숍을 하는데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 고객들이 와서 커피도 마시고 기업에서 협찬받은 샘플을 가져다 놓으면 아무 샘플이나 다 집어가요. 커피도 마시고 샘플도 집어가고 편안하게 여성 마케팅 카페를 하나 제가 오픈을 했고요.

2층은 저희 사무실로 쓰고요. 3층도 저희 직원들 회의실이 있고요. 그리고 3층 바깥이 베란다가 넓어서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도록 제가 다 해놨어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 직원들과 같이 바비큐 파티를 해먹었죠.

어떤 날은 점심에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직원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래요. “오너는 아무나 하나, 불도 잘 붙여야지” 하고 그래요. 왜냐하면 불붙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제가 했더니 너무 좋다고 하면서 굉장히 맛있게 먹고 했는데요.

우리 직원들이 저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 낙천성이 어디서 오냐, 어젯밤에 다 죽어가도 꼭 웃고 나오고, 어젯밤에 금방 앰블란스에 실려갈 것 같을 정도로 눈이 게슴츠레 해서 기어들어 갔는데 아침 6시 반만 되면 회사에서 귀신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저사람이 사람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오너는 정말 회복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다 성공하려면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능력, 실패로부터의 회복능력이 뛰어나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제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회복하는 능력 있잖아요. 이런 낙천성이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고 살려내는데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재테크다. 돈 있으면 누가 재테크를 못하겠어요.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악재테크다.’ 이런 얘기를 해요. 인생의 악재가 많잖아요? 잘못해서 전세금이 홀라당 날라가고, 보증 잘못 서서 날라가고 하는 일들이 많죠. 그래서 인생의 최고 악재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일어서는지가 인생에서는 가장 멋있는 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언제든지 회복력, 내가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언제든지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죠.

▶ 그런데 그 회복 능력이라는 것이 체력과 정신력 외에 또다른 ‘알파(α)’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스트레스를 무지 받으면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드라이브를 하잖아요. 그러면 스트레스가 안에서 빠져 나간 거잖아요.빠져 나갔으면 몸 안에 뭐가 있겠냐고요. 아무것도 없죠. 그러면 그 다음 스트레스가 또 들어온단 말이죠. 그러면 또 빼내고요. 그런데 이럴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아들여도 견딜 수 있을 만한 컨텐츠가 몸 안에 있으면 되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으로 무얼 얘기하냐면,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나라고 해요. 만나서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확인하고요. 또 훌륭한 책을 많이 보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스트레스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저력을 키우면 남보다 스트레스 덜 받을 수 있고, 남보다 회복능력이 뛰어나죠.

그래서 회복능력이 뛰어나고 정신능력이 뛰어난 분들을 제가 만나보면 너무 존경스러운데요. 그런 분들은 자기만의 마음력이 굉장히 강해요. 일곱 살 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거든요. 살면서 강하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그런 분들 보면서 정말 훌륭하다, 나도 닮고 싶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세상에 닮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 김미경 대표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다 ‘멘토’군요?

정말 이 직업이 좋은 이유가 매일 다른 곳에 가서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는 거죠. 한 달에 강의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이 만 명이 넘어요. 만 명한테 배우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 상당히 ‘카멜레온적’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도대체 어디로 튀었던 겁니까?

제가 튀고 싶은 방향은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이냐면 제가 사람들과 함께 얘기를 하고 세상에 알려지는 데 있어서 나 개인이 알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김미경이 어떤 사람으로 알려질 것인가에 굉장히 집중했어요. 그냥 부자로 알려질 것이냐, 아니면 어떤 기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냐의 선택에 있어서 저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냐면, 누군가에게 내가 있고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가 가진 힘이 영향력이 되면 참 좋겠다고 늘 생각했고, 그 영향력을 발산시키는 방법을 굉장히 다채롭게 변화시켜 가고 있는 것이죠.

▶ 김미경 대표와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내일도 계속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존경하는 분 글 하나 더 올려본다,,,,새벽 2시 50분에 멀 하는 건지,,,,

난 잠은 도저히 못 줄이겠으니 ,,,천천히 줄이리라 생각하고 김미경 강사님처럼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겠다,,,

홧팅!

출처 : 스타강사 김미경 인터뷰내용
글쓴이 : 깜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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