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뉴라이트의 하얀설원입니다!!
오늘로써 주요부분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부분의 분석이 끝났습니다
이부분이 이번에 만들어질 홍보지의 주요내용이 될것입니다
그 이후 해방이후 부터는 보수세력으로 부터 역공을 받을수 있는부분도 많기에
많은 내용을 수록하지는 않을것입니다
또한 저들의 친일파적 역사관과 논조를 강조하기위해서라도 이부분들이 가장 강조되야 할것입니다
한번 보시도록하시죠..!!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의 실체를!!
제 2부 근대사회의 태동과 국권의 상실 (p 30~75)
34p 민왕후(편집)
흔히 민비로 불린다.
1894년 8월 7일 윤치호는 영문일기에서 민왕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는 집권기에 걸쳐 그녀의 신조' 무슨일이 일어나도 좋다. 우리 세사람만 안전하다면야' 였다
세사람은 왕과 왕후와 왕자였다.이 지독한 이기주의는 그에 마땅한 파멸을 몰고왔다"
->국모의 죽음을 두고 이런말을 할수 있다는것 자체도 어이없거니와 이런내용을 교과서에 왜 올리는지도 의문스러움
p.40 갑신정변에 대한 상반된 평가 (편집)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는 갑신정변을 일본에 의존하여 경거망동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인적 역량만 잃어버렸으며 일본에 의한 식민지와의 위기만 부추겼다고 낮게 평가하고 있다.갑신정변의 주역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근대화를 추구했던 선각자들로 적극 반영해야한다
p.44 동학농민 봉기의 재인식
동학군의 봉기를 "농민혁명" 이나 "농민전쟁" 이라 하여 국가체제의 급직전 변혁을 모색한 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대신 "동학동민 봉기"라는 호칭이 농민군의 정신적배경,사회적계층,저항의 양태를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하다
p.54 노와 비
1904년 네덜란드 기자 그랩스트가 서울에서 찍은 것이다.물동이를 인 채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당시 여인들은 저고리가 짧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상생활에서 가슴을 드러낸경우가 많았다.
->실체 조사 필요함 , 외국기사 인용이기에 직접적 비판 못함
p.63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
종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에 대한 평가는 망국의 책임이 크다 하여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편이었다.그런데 1970년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의 정책을 "광무개혁" 으로 부르면서 근대적 개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나타났다.그에 따라 고종과 민왕후 세력은 근대화의 주역으로,대한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 유사한 근대국가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새로운 평가는 대한제국이 내외 위기에 봉착하여 나름의 대응을 모색했음을 밝혔다는 의의는 있지만, 대한제국의 개혁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망국에 이르게 된 한국근대사의 흐름을 객과적으로 볼수 없게 할 우려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뒤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의 움직임은 없었다.
제 3부 일제의 지배와 민족독립운동의 전개 (p80~126)
p.84 조선민사령
민사령은 일제가 한국을 지배할 목적으로 공포하였지만 한국인의 사유재산권과 경제활동의 자유역시 보장하였다.이처럼 민사령을 통해 한국인도 근대적 사권의 주체가 되었다
->총독부에 의해 사적 재사권을 확보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보장되었다는 내용
p.85 토지신고
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 전체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지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것이다
토지조사 사업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국가가 토지재산에 대한 증명제도를 완비함으로써 토지거래가 활성화되고 토지를 담보로한 금융이 발전하였다
p.86 임야조사사업
조선왕조의 임야정책은 공유의 명분을 내세워 사유림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임야의 사적관리 주체가 없어 산림이 황폐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이와 달리 총독부의 임야정책은 사적 관리주체를 창출하여 산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을 시행되었다.
p.86 산미증산계획 (내용편집함)
저수지,보,양수장과 같은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종자를 다수확품종으로 개량하였으며 흥남질소 공장 완공후에는 화학비료의 투입량도 늘어났다.1930년대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석이 증가했는데,그가운데 570만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쌀의 생산이 늘어난것은 쌃값이 다른 물가보다 많이 오른 시장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으며 농민과 지주는 수익성이 좋은 쌀 농사에 집중하였다.
p.92 여자 정신근로령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을 군수공장에 동원하였다.해방후 한국사회에서는 이 정신대를 일본군의 위안부와 혼동하여왔는데 이둘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p.93 군 위안부 (제목조차 없음)
군시설의 일부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여인들이 위안부로 노예처럼 수용되어 일본군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였다
★위의 군 위안부 기사옆 위안부 사진 밑 해설 내용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것은 큰 돈벌이,가족의 빚갚기,쉬운일,새로운삶등이었다.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들은 해외취업에 지원하고 몇백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즉 끌려가거나 강제 동원됐다는 이야기 한마디도 안하고 돈벌로 갔다고 말하고 있음
P.94 식민지 시기 사회간접자본의 확충(편집)
철도,통신,해운에서의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은 신민지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활성화 하였다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목적과 의도에 대한 설명없이 마치 한국을 위해서 해준것처럼 기술함
P.95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의 진전 (편집)
1910->1940년 인구 증가의 원인은 공중 보건과 의료개선에 있으며 총독부는 보건위생업무를 경찰소관으로 하여 식수와 오염원을 관리하고 예방접종에 힘써 전염병의 발생하 전파를 막았다.
농촌사회의 빈궁은 인구유출의 압력으로 작용하여 200만명이 일본과 만주로 이주하였다
P.97 식민지 경제개발
무역의 확대와 자본의 유입
식민지 한국의 경제는 주로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하였다.1910~1939년의 수출은 51배로
수입액은 35배로 커졌다.총생산액에 대한 수출입무역의 비율은 1910년대 평균 23%에서 1920년대
42% 1930년대 54%로 점점 높아졌다.
자본의 유입도 식민지 경제 개발을 촉진하였다.모두 40억 엔에 달하는 일본 자금이 한국에 유입되었다.1920년대까지는 주로 일본 정부의 국고 자금과 식산은행 자금이 유입되어 농업개발과 철도건설에 투자되었다.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민간 대회사들의 자본이 건너와 광공업과 전기사업에 투자되었다.
->식민지 공업화론에 대하여 경제학사 시간에도 따로 배웠던것이기에 저도 한마디하겠습니다
식민지 공업화의 주된관점은 일본 경제의 구조조정과 관련 있습니다.1차 대전이후 수출이 많이 막히고 열강들과의 수출경쟁에서 밀린 일본의 중소기업의 회생방안으로 식민지 한국으로의 구조조정이 많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정부의 지원책이 있었습니다.즉 우리 좋으라고 해준일이 아니었죠
P.98
식민지 한국인의 생활수준
신민지 시기에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일제의 수탈로 인해 극도로 열악해 졌다고 보는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예컨데 생산된 쌀의 절반이 일본에 빼앗겨 한국인은 초근목피의 비참한 생활을 강요 당했다는것이다.이 같은 수탈론에는 실증적인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쌀은 일본에 수탈된것이 아니라 경제논리에 따라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들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콩과 조가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때 1인당 열량섭취가 줄었다고는 단언할수 없다.
생활비 가운데 식품비의 비중을 나타내는 엥겔계수가 하락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1890~192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가 1~2Cm커진것도 생활수준의 개선을 나타낸다.
P.100 김성수와 경성방직회사
김성수가 경성방직을 세웠으며 경성방직의 성과와 김성수의 업적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으며 친일 행각에 대한 언급 전혀 없음
P.107 한글운동
민족계 신문사도 한글의 대중보급과 표준화에 기여하였다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새로 제정된 맞춤법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였다.두 신문은 학생과 지식인의 농촌계몽운동으 일환으로 전개된
한글보급운동을 적극지원하였다.
->이건 비판할 내용은 아니지만 동아 띄워주기가 이교과서에 너무 심해서 올립니다
P.109 사회경제사학과 실증사학
이병도,손진태,이상백.김상기등은 민족주의사학과 유뮬사관을 모두 비판하고 엄격한 문헌고증을 통해 개별사실을 정확히 밝히는 실증사학의 입장을 취하였다.이들의 실증사학은 역사학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옆에 그림 이병도 사진 및 해설
한국사 연구의 실증사학이 뿌리내리는데 공적을 남겼다
->이병도가 누구인데!!! 이런말을...ㅠㅠ 친일사관 수립과 전파에 힘쓴 놈을....ㅠㅠ
P.112 민족의식의 성장
한국민족으로서의 동질성보다는 양반과 상민 신분의 구별의식이 더 강하였다.또한 양반시직인들은
한국의 문명이 기자조선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았다.조선왕조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한국인 전반을 포괄한 강렬한 역사적 운명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민족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구한말계몽운동은 망국의 위기에 처한 한국인에게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하였다.러일전쟁이후
일본에서 전파된 "민족" 이라는 용어는 한국인을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P.117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 기원
안창호는 소련령의 대한국민회의,국내의 한성임시정부,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운데
한성임시정부를 가장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하였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 말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란 한성임시정보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1919년 9월 다른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출범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말한다
P.120 상하이 임시정부의 분열과 침체
임시정부에도 공산주의 세력이 점차 카졌다.그러한 배경에서 1925년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구미위원부를 설치 운영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면직시켰다.
P.129 김구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아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저 내용을 교과서로써 배우게 됐을경우...
이나라의 앞날이 위험합니다...
친일 청산..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타도 뉴라이트!! 친일청산!!
http://cafe.daum.net/newright18 안티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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