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의 마지막 유언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저씨가 유관순의 시신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고 결국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시신을 인도받았는데 당시 일본은 유관순의 시신을 석유상자속에 토막을 내어 보관하고 있었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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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1902-1920) 열사 새 표준영정
유관순(1902~1920) 열사 표준 영정이
충남대학교 윤여환(53세) 교수에 의해 21년 만에 유 열사의 생전 모습에 가장 가깝게 재현된 새 영정은 가로 120㎝ 세로 200㎝의 전신 좌상으로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하여 정부 표준 영정 78호로 지정되었다.
봉안된 새 표준 영정은 이번에 확정된 유 열사 영정의 얼굴은 기존 영정에서
나타났던 수심 깊은 중년부인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 민족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영정 속 유 열사의 자세는 3.1운동 당시 만세 운동을 벌이기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 잠시 앉아 태극기 쥔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룻바닥 등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실성있게 재현되었다.
특히, 얼굴 부분은 안면근육의 조직을 선과 점을 따라 표현하는
조선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과,
채색은 비단 뒷면에 색을 칠하는 ‘복채기법’을 사용
사실감을 살린 것이 특징이며,
유 열사의 얼굴 부분은 이화학당 재학시절 단체사진 2장과
수형자기록표 사진 등 3장의 합성을 통해 제작에 반영했으며
자료사진 분석을 통해 추가로 찾아낸 속 쌍꺼풀 등도 표현했다.
종전의 영정(왼쪽)은 1896년 장우성 화백이 제작했으나 옥중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있는 수형자 기록표 사진을
참고해 나이 들고 수심이 깊어 보인다는 지적과
작가의 친일 행적 논란에 휩싸였었다.
(이화학당 시절 사진, 뒷 줄 맨 오른쪽이 유관순 열사)
(옥중 유관순)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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